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드스톡 페스티벌 (문단 편집) === 준비 과정 === 1999년 우드스톡 행사장은, 1969년 당시의 넓은 대평원 대신 미국 뉴욕주 롬의 폐쇄된 상태였던 그리피스 공군기지가 개최지로 낙점되었다. 15,000명을 수용할 주거 부지와 도로가 있었고 보안 체계와 병원,소방서 등이 갖춰져 1994년에 했던 것 처럼 수백만 달러를 들여 시설을 구축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으며 69년 우드스탁에서 있었던 대규모의 무단침입 사태를 막을수 있는 콘크리트 방벽까지 갖추고 있었다. 원년 우드스탁 당시 이 대규모 도둑 입장 때문에 주최측은 성황 대비 그리 흑자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군 기지 특유의 콘크리트 방벽은 주최측 입장에서는 든든한(무단입장 방지) 시설물이었지만 그 특유의 살풍경함으로 인해 임직원들간에 리모델링 의견이 나왔고 합판을 댄 후 화가들을 불러다 각종 그림들을 그려 넣었다. 뜻은 좋았으나 이 합판들은 후술할 폭동에 아주 좋은 재료가 된다. 당시 뉴욕의 롬은 그리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도시였고 시장은 잉여부지라도 살려볼까 하는 심정으로 섭외에 응했다고 한다. 그 후 진수식의 패러디격으로 무대 골조에 타이다이 티셔츠(홀치기 나염. 히피의 상징이자 69년 오리지널의 키워드)로 감싼 포도주 병을 부딪혀 깨려고 하나 아무리 천으로 감쌌을지언정 무려 10회정도 병을 휘둘러 쇠파이프에 겨우 깼다. 시장 술회에 따르면 이때부터 전조가 안 좋았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영상을 보면 성인 남성이 풀스윙으로 휘둘러도 병이 기이하게 깨지지 않는다. 개최를 확정하고 난 뒤 주최측은 세계구급 인지도의 아티스트들을 섭외하기 시작했는데 당시의 흐름에 맞춰 [[하드락]] 또는 [[누메탈]] 밴드들이 다수였다. 내부에서도 섭외 명단을 재고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묵살당했다고 한다. 당시 현장관리 부책임자였던 리 로젠블렛이 회고하길 콘, 림프비즈킷 같은 라인업을 보고 '사랑과 평화'라는 우드스탁의 취지에도 안 맞고 너무 선동적이며 분노 어린 음악을 하는 밴드들이라 라인업을 재고해야 할 것 같다고 임원 회의 중에 제안을 하였으나 가볍게 무시 당했다고 한다. 당시 22세였던 로젠블렛은 누메탈에 대해 잘 아는 세대였지만 일단 핵심인 마이클 랭과 기성세대 임원들은 콘이나 림프 비즈킷,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이 어떤 음악을 하는 밴드인지 관심조차 없었고, 일단 이유야 어찌 됐든 "돈 되는 밴드"를 섭외한 것이다. 새파란 애송이가 대선배이자 어른들 앞에서 훈수 두는 듯한 모양새가 되어버려 임원 전원이 쏘아보자 로젠블렛은 꼬리 내리고 바로 의견을 접었다고 한다. 이렇게 우드스탁99는 이 공격적 성향의 누메탈 밴드들을 필두로 술과 마약에 절어버린 관객들과 이들이 미쳐 날뛰기에 아주 좋았던 통제불능의 밀레니엄 분위기, 무능한 운영에서 비롯되어 무너진 행사 내 치안과 제반사항이라는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며 막장의 길로 치닫게 된다. 당시 유료관객으로 집계된 인원만 25만명에 달한다. 이 인원이 피부로 와닿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 정도면 [[경주시]]의 총인구임을 상기하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